선한 인연 / 이근후
이게 무슨 연분일까? 내가 우표지의 권두언을 쓰게 되다니……. “길에 돌도 연분이 있어야 찬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인연이 있어야 이루어진다는 뜻일 것이다. 권두언 청탁을 어찌 길거리의 돌에 비견할 것인가. 내가 우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우표와 상관없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신과 외래에서 진료를 하면서 한 고등학생 환자를 만났다. 그는 만성적인 조현병 환자로 사람들을 싫어해 하루 종일 방 안에서만 지냈고, 사회성은 물론 없었으며 가족마저 대면하지 않으려고 했다. 약을 타러 오는 날만 나와 겨우 마주쳤다. 어떻게 하면 이 환자의 사회성을 좀 높여 볼까 고심하다 생각해 낸 것이 내가 근무하던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에서 중앙우체국까지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주문을 했다. 첫째, 꼭 걸어서 중앙우체국까지 갈 것, 둘째, 꼭 기념우표를 사 올 것을 부탁하고 2주일에 한 번 외래로 만나기로 했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 주었다. 걸어가라는 주문은 걸어가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눈 맞춤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해서였다. 기념우표를 구입하려면 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무슨 기념우표를 달라고 말을 건네야만 한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나 회를 거듭할수록 그의 태도, 행동 등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우표를 매개로 치료 효과를 많이 보았다. 치료 효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표 또한 많이 모으게 되었다. 이 우표들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데 줄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문득 매년 네팔을 다니면서 친해진 네팔의 화가가 생각났다. 우표에 조예가 깊은 그에게 그동안 모인 우리나라 기념우표를 선물로 주었다. 이로써 나와 우표의 인연은 끝나는가 싶었는데 미처 주지 못하고 남아 있는 우표가 한 박스 있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검색하기 시작한 것이 우표동호회다. 여러 곳을 찾았으나 당장 입회하고 활동하기가 상대적 으로 쉬운 ‘우표를 사랑하는 사람들’ 카페가 인연이 되었다. 카페에 들어가 보니 네팔우표에 관한 소개는 없었다. 나는 네팔을 알리고 싶은 일념으로 매일 우표 이미지와 글을 올렸다. 남아 있는 우리나라 우표는 댓글을 달아 주는 회원에게 선물로 드렸다. 이렇게 주소를 서로 주고받은 인연이 150명이 넘었다. 인연(因緣)에서 인(因)이 원인을 이루는 근본을 말하는 것이라면 연(緣)은 원인을 도와 결과를 낳게 하는 것이라 한다. 인이 있어도 연이 받쳐 주지 못한다면, 반대로 받쳐 줄 연은 있어도 원인될 인이 없다면 서로 맺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내가 인 (因)이라면 우표지는 나를 받쳐 주는 연(緣)이다. 우표지가 중심이라면 내가 우표지를 받쳐 주는 연(緣)이다. 어느 쪽이 인이고 연이든 나에겐 아주 즐거운 일이다. 우리 속담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우표에 빗대어 해 본다면 ‘우표가 수백만 장이라도 엮어야 보배다’가 되겠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사귄 우표 고수님들의 도움을 받아 네팔의 산 우표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봤다. 그 보배가 바 로 《Yeti 히말라야의 하늘 위를 걷다》이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이 책이 나올 때까지 인연 닿은 분들이 많다. 선한 인연이다. 기왕 엮인 인연이라면 더 많은 보배를 만들고 싶다. 우표지 권두언을 쓰는 것을 인연으로 하여 더 많이 배우고 싶다. 나로서는 일천한 경 험으로 노래(老來)에 큰 선물을 얻은 셈이다. 길게 이어 갈 선한 인연(善因)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