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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감사편지가 주는 선물




감사편지가 주는 선물


                                                                                                        김경은 경향신문 편집위원


우편함에 / 봉투꼬리 / 누굴까?

살며시 / 잡아당기니 / 푸득푸득
종달새 되어 / 날아온 너

시인 김금래가 쓴 <편지>라는 동시의 한 대목입니다. 편지가 주는 반가움이 느껴집니다. 한 편의 시가 편지에 대한 추억을 부릅니다. 대학시절 일주일에 적어도 두 편 이상의 엽서를 쓰기로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 기쁨이 된 사람에게 감사를 전하는 엽서였지요.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 가장 많이 쓴 듯합니다. 어느 날 교인 사이에 제가 쓴 엽서가 화제가 된 모양입니다. 목사님이 “경은이로부터 편지를 받지 않으면 설교를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엽서가 기다려지는 만큼 더 열심히 설교를 준비한다”는 말씀을 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쑥스러웠습니다만 엽서 보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실 편지쓰기가 특별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가족과 친지의 안부와 감사 인사를 편지로 주고받았습니다. 연인 간의 편지 왕래는 더욱 잦았습니다. 연애는 연서로 무르익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국군의 날 행사 중 하나가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위문편지였죠. 외국친구와 펜팔을 하면서 외국어를 익히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펜팔을 원하는 사람들의 주소를 게재, 편지 친구를 만들어주던 잡지도 있었습니다.
저의 엽서쓰기는 윈스턴 처칠의 자서전에서 배운 것입니다. 처칠은 편지쓰기를 좋아했습니다. 정책 토의도 편지로 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호소하는 편지를 950통이나 보낸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아마 당시 통신 사정 때문일 겁니다. 저를 감동시킨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신세진 사람에게 감사의 엽서를 썼고, 편지를 주고받다가 정치가가 되길 결심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아직까지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생전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편물에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게, 런던’이라고 쓰면 그에게 전달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매일 쓴 감사편지도 그런 평가에 적지 않은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처칠을 흉내 내길 잘했다고 생각든 때는 기자가 된 뒤였습니다. 제가 초임기자 시절에는 기사를 원고지에 작성했습니다. 부장은 빨간 펜으로 소속 부원의 기사를 데스킹했습니다. 유혈이 낭자해진 저의 원고지를 보면서 자괴감에 빠진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비교적 자주 편지쓰기를 한 탓일지도 모릅니다.
간혹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을 묻는 기자 지망생이 있습니다. 사실 글 잘 쓰고 싶다는 것은 기자 지망생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등학생은 논술을, 대학생은 논문을, 직장인은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글쓰기에 자유로운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편지쓰기를 권합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줄 아느냐’며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지요. 사실 저 역시 진심을 담은 손 편지를 언제 써봤는지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굳이 옛 생각까지 떠올리며 편지쓰기를 권유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이 좋은 글일까요. 공감을 낳는 글입니다. 편지는 공감을 낳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아도, 철자가 틀려도, 길게 쓰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편지는 진실을 담는 그릇입니다. 진심어린 편지에서 세상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의 아픔을 안아주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편지의 기다림은 울림의 공명을 확대 재생산하는 시간입니다.
편지쓰기가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기술적 이유도 있습니다. 가장 큰 이점은 읽어줄 사람이 특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보통 거리낌이 없는 사이입니다. 또 글 내용을 둘러싼 저간의 사정을 서로 알고 있습니다. 뚜렷한 주제를 부담 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을 쉽게 글로 표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일기와 다르게 자신의 글을 반드시 읽을 대상이 있다는 것도 장점입니다. 오탈자가 있는지, 비문은 없는지 소리 내어 읽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편지가 글쓰기에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편지를 왕래하면 일상의 변화도 만듭니다. 추억이야기가 편지의 화제였다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지요. 편지의 내용이 서양요리법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 요리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것입니다.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외로움도 잊고 활력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미하엘 슐테가 쓴 소설, <<우체부 파울 아저씨>>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우표 이야기도 안 할 수 없군요. 편지를 자주 쓰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표에 관심이 생깁니다. 저도 한 때 우표수집을 했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 꽤 두꺼운 우표첩을 세 권이나 가졌습니다. 찢어진 문위우표도 한 장 있었습니다. 북한 우표도 있었고요, 에티오피아의 삼각형 코뿔소 우표도 있었습니다. 그 우표를 보는 즐거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우표수집가로 유명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이 한 말입니다. 그는 우표수집광이었습니다. ‘대통령 우표’를 보면서 국가와 대통령의 역할을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마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요. 얼마나 우표수집에 빠져 있었는지 대통령이 된 뒤에는 우표수집가 친구인 제임스 A. 팔리를 우정장관에 임명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하나의 예입니다. 우표는 ‘지식과 상식의 보고’입니다. 우표에는 각 나라의 역사, 문화는 물론 경제, 사상, 자연 등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우표라는 작은 화폭에는 한 나라의 기념비적 사건, 위대한 인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화재, 동식물 등이 담겨 있습니다. 우표를 수집하다 보면 역사적 안목과 예술가적 심미안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지요.
우리는 편지가 사라져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럴 때 쓰는 편지는 더욱 소중할지 모릅니다. 그 대가(회신)는 반드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덤으로 소인 찍힌 우표도 함께요. 그 우표는 한 국가의 정치·경제·사회·디자인 관심사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것은 쌓이면 역사가 되고 지식이 됩니다.
편지가 사라지자 우표수집 취미가 특별한 일이 됐습니다. 우정사업본부의 ‘우취 보급’ 통계에 따르면 우취인구(우표애호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으로 우표수집을 취미로 삼는 인구)는 2015년 8만8959명이라고 합니다. 10년 전에 비하면 절반 수준입니다. 이런 취미가 사라지는 것은 문화적 손실입니다. 우표 사용을 통한 문화적 소양 증진을 위해서도 더 많이 편지를 써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