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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표는 살아 숨 쉬는 희로애락 역사의 상징






우표는 살아 숨 쉬는 희로애락 역사의 상징


                                                                      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우표는 생물처럼 살아 숨 쉬는 우리나라 역사의 상징이다. 우정총국 창립과 우표 발행 후 138년 동안의 기간은 물론 반만년 동안의 희로애락 역사가 빠짐없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른 엄지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로 작은 사각형 우표 안에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자연-역사-예술-발명-과학 등 모든 역사가 담겨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가 발행된 이후 각종 우표는 우편을 상징하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부족함이 없었다. 작은 우표 한 장이 커다란 파발마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갑신정변과 일제 강점 치하에서 암흑기를 맞기는 했으나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으로 성장하여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중흥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문화콘텐츠로서의 가치도 당연히 으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눈부신 문화의 발달은 우표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전화-이메일-카톡-페북 등 통신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각종 자료와 고지서는 ‘요금 별납’으로 발송되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편지와 우편물에는 우표 대신 즉석 발행 스티커가 부착되면서 우표가 설 자리가 별로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우표에 대한 진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우표 사용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그 주요 역사를 추적해 본다.


우리나라처럼 인구 대비 우표를 많이 사용한 나라도 흔치 않다. 특히 국군의 창설과 함께 우표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한 물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자식과 남편이 군에 입대한 부모와 아내들은 밤을 하얗게 밝히며 편지를 썼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우체국으로 달려가 우표를 사서 침을 발라 편지에 정성스럽게 붙인 다음 우편함에 넣었다. 우표를 파는 가게와 빨간 우체통이 있는 마을에서는 우체국까지 달려가는 번거로움은 없었으나 혹시라도 편지가 분실될까 걱정되어 우체부가 편지를 꺼내 갈 때까지 우체통 주변을 맴도는 부모와 아내도 있었다. 또 우체부가 마을에 나타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 나와 혹시나 아들과 남편으로부터 편지가 왔을까 확인하기도 했다. 이 시절이 가장 빠른 속도로 우표 사용이 늘었던 시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군부대에서 보내오는 편지에는 우표 대신 ‘군사우편’이라는 소인이 찍혔지만 군부대로 보내는 가족들의 편지에는 어김없이 우표가 붙었다.


어디 그뿐인가? 전국 초-중-고등학생들이 보내는 국군장병 위문편지가 인연이 되어 계속 편지를 주고받는 사례가 늘면서 우표 사용량 증가에 한몫을 하기도 했다. 이어 국군의 숫자가 계속 증가하여 60만 명에 이르면서 우표 사용은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정부의 규모가 계속 커지고 각종 자영업과 중소기업이 늘어나고 대기업까지 등장하면서 전국 각지에 설립된 우체국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아직 전화가 무척 귀한 시절이라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친지-지인들과는 편지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이후에도 우표 사용은 계속해서 늘어났는데,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가 파견되고,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쟁에 군인이 파병되고,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에 근로자들이 파견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많은 광부와 간호사 그리고 근로자들이 자원하여 낯선 이국땅으로 떠났고 6·25 전쟁 당시 16개 나라의 도움을 받았던 우리나라는 월남전쟁에 적지 않은 군인들을 파병했다. 이때도 편지는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고 우표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로 떠오르며 사용량 또한 크게 늘었다.


한편 편지쓰기가 일상화되면서 새로운 문화의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펜팔 문화이다. 펜팔이란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구를 사귀는 것을 말한다. 주로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에서 이루어진 펜팔의 열기는 여름 삼복더위보다 뜨거웠다. 청소년 신문은 물론 주간 신문과 잡지까지 펜팔 코너를 마련하여 친구를 찾는 사람의 간단한 프로필을 소개했으며 이 프로필을 보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신문과 잡지에 펜팔 코너가 없으면 구독 또는 판매가 줄어들 정도여서 앞다퉈 펜팔 코너를 만들고 지면을 늘리면서 펜팔 인구는 무서운 속도로 늘어났다.

특히 이성에 대한 호기심까지 발동하면서 신문과 잡지에 프로필이 소개되면 수백 통의 편지를 받는 것은 예사였다. 이에 따라 우체부들은 때로는 하루에 수천 통의 편지를 배달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이 펜팔 편지로 수신인 한 사람에게 적게는 수십 통에서 많게는 수백 통을 배달하기도 했다. 당시 필자의 후배였던 K씨는 지인들의 펜팔 편지에 붙은 우표를 모아 몇 권의 앨범에 보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표수집가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는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바뀌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고향인 시골을 떠나 서울 등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특히 서울 등 주요 도시에 공단이 생기면서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심지어는 무작정 상경하는 사람까지 늘면서 서울 인구는 만원이 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으로 가족과 주고받는 편지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바로 이때부터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여름과 겨울방학 숙제로 우표 수집이 추가되면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표 수집에 관심을 가졌다가 자연스럽게 우표수집가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필자는 요즘도 가끔 손편지를 쓴 다음 우표를 붙여 보내고 있다. 그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손편지를 쓰면 웬만한 부탁은 모두 해결되고 가보로 보관하겠다는 지인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한다. 우리나라처럼 각종 기념일이 많은 나라도 흔치 않다. 설날로 시작하여 어린이날-어버이날-스승의 날-근로자의 날-국군의 날 등 수많은 날 중에서 12개만 골라 한 달에 한 번씩 손편지를 쓴 다음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내는 행사를 했으면 좋겠다. 한국우취연합이 주최로 손편지를 모집하여 시상도 하고 수상 작품집도 발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잘하면 베스트셀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펜팔 문화처럼 우표를 활용한 새로운 문화가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